'108번뇌 계단' 왜 하나가 부족할까
남산계단
“여기가 ‘김삼순’에서 나왔던 그 계단이잖아. 삼순이랑 삼식이가 이쯤에서 키스했을걸.” 위치를 잡은 후 자연스럽게 디카를 들이대는 남자. ‘지나가는 사람만 없었더라면 우리도 그들처럼?’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남산 계단은 작년 여름,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의 엔딩신을 촬영했던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백범광장 쪽으로 난 계단을 ‘삼순이 계단’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드라마를 촬영했던 진짜 ‘삼순이 계단’은 백범광장 쪽 계단이 아니라 케이블카 쪽(계단에 서면 맞은편으로 백범광장이 아닌 삼풍 아파트가 보인다)으로 난 계단이다.
총 111개로 중턱쯤 오르면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힘들게 오른 만큼 앞으로 가야할 길도 멀다는 것을 암시하듯 삼순이와 삼식이도 이 계단 중턱쯤에서 키스를 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할일은 명백하다. (중략)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나 김삼순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는 삼순이의 대사를 떠올리며 계단 끝까지 오르니 남산 식물원이 보였다. 이 계단 끝(정상)은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실연당한 후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주로 밤에 맥주 캔 하나를 사들고 와 들이켜 마신 후 허공에 내뿜는 우수에 찬 장면을 촬영했다.
산책을 나왔던 한 주민은 “실제로도 그렇게 혼자서 청승맞게 술 마시는 사람들도 종종 있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촬영 명소는 촬영 명소일 뿐, 운치 있는 계단은 ‘삼순이 계단’에서 케이블카 방면으로 100m 떨어져 있는 남산산책로 옆 계단이다.
나무 그늘 사이로 나 있어 한 발 한 발 오를 때마다 도시의 시끌벅적함과 멀어지는 기분. 천국으로 오르는 듯 해 내 멋대로 ‘천국의 계단’이라 이름 붙여주고 내려왔다.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내려가다 작은 슈퍼 앞에서 ‘하트 뻥튀기’를 발견했다. 색깔도, 맛도 보름달 모양의 동그란 뻥튀기 과자와 똑같지만 하트 모양이 특이해 남산을 오르는 연인들에게 인기 폭발이다. 계단 옆 동네는 소문난 음식점이 모여있어 점심 시간만 되면 택시며 승용차들이 주차 전쟁을 벌인다. 찾아가는 길: 402번·0014·4012번 이용, 남산도서관 앞 하차.
후암동 108계단
용산고등학교에서 남산 방향으로 걷다 보면 202(구 45)번 버스 종점이 나온다. 그 앞으로 좁다란 골목들이 펼쳐져 있다. 뒤편으로는 고개를 뒤로 꺾어야 겨우 다 보일 정도로 남산이 우뚝 솟아있다. 종점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길로 들어선다.
길은 다시 두 개로 갈라지는데 왼쪽에 있는 계단이 바로 108계단. 계단 너머 ‘해방촌’(용산 2동)에 사는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밟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사연도 많아 보인다. 하나, 둘, 셋, 넷… 어? 그런데 꼭대기까지 다 올라도 계단이 107개다. 몇 번이고 다시 세어봤지만 하나가 모자란다.
팔랑팔랑 치맛바람 일으키며 계단을 내려가던 여학생에게 물었다. “107개 맞아요. 공사하다가 한 개가 없어졌대요.” 매일 이 계단을 통해 등하교를 한다는 김유경(보성여중 2)양이 그렇다니 안심. 그래도 몰라 후암동에서 37년 살았다는 ‘백운유리’ 주인 윤성숙(60)씨에게 물었더니 “그래?”하며 반문하는 분위기. “‘108번뇌 계단’이라고 하는 건 들어봤어도, 107개라는 건 처음 알았네.
불교 믿는 사람은 저 계단으로 다니면 건강은 좋아진다고 하더라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부 주민들 사이에선 “계단수가 108개여서 ‘108’이 아니라 예전에 이 계단 위로 일본 신사 본전이 있었고, ‘108’이라는 이름은 그때 불교용어인 ‘108번뇌(百八煩惱)’에서 유래됐다”는 얘기도 있다.
수십년 전 분위기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동네를 내려오다 보니 유난히 부동산이 눈에 많이 띄었다. 주민들 사이에선 재개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108, 아니 107 계단 밟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일까. 찾아가는 길: 202번 버스 이용, 후암동 종점 하차 후 우리은행에서 왼쪽으로 100m.
신덕교회 옆 계단
마포구 신공덕동 신덕교회 바로 옆 왼쪽 계단은 남산 계단, 후암동 계단에 비하면 굉장히 가파르다. 발 헛디디면 큰 일 날 것만 같다. 전반적으로 슬쩍 휘어져 있고, 계단 갯수도 120여 개나 된다.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오르는 길 왼쪽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아파트가, 오른쪽엔 지은 지 30~40년 되어 보이는 낡은 집들이 이어졌다. “옛날 이짝(이쪽)이 다 ‘하코방’(판자집)이 있던 곳인데 이짝은 재개발이 되고, 이짝은 재개발이 안 돼서 여적까지(여태껏) 이러구 사는 거지 뭘.” 주민 정진초(63)씨의 말. 그러고 보니 재개발의 그늘이 이 계단 하나를 사이로 확연히 갈라져있었다. 다 오르니 맞은편으로 공덕초등학교 운동장이 훤히 보였다. 골목골목 옛날 정취 흠뻑 느끼며 혼자 오르고 싶을 땐, 신덕교회에서 왼쪽으로 5~10m 더 걸어가 보자.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 사이로 색다른 느낌의 계단이 나온다. 페인트 벗겨진 담벼락, 다 깨진 시멘트 계단을 뚫고 나온 민들레, 마당에서 빨래하는 소리, 두런두런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 그야말로 서민들의 희로애락으로 굳은 계단이다. 어차피 신덕교회 옆 계단과 이어져있어 다시 만난다. 찾아가는 길: 261, 163, 263, 604번 버스 이용, 신덕성결교회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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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으로 한 걸음…그 곳에서 유년의 나를 만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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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멈춰 있었다. 용산구 서계동 만리시장 위쪽 배문고 담장과 나란히 나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유년(幼年)의 어느 날 오후, 골목으로 쏟아지던 햇볕에 취해 까무룩해지던 날이 떠올랐다. 어릴 적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만 같던 그 골목길이 여기에 그대로 있었다. 가깝고 따듯하고 익숙하지만 돌아갈 수 없을 줄 알았던 그 곳…. 서울 속에서 떠나는 시간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배문고 뒤편 골목과 만리동 일대는 드라마나 영화를 찍는 이들이 단골로 촬영을 하는 곳이다. 삼선동이나 북아현동의 골목길과 함께, 구불구불 이어진 길은 서울에서도 몇 안 되는 옛날 골목으로 꼽힌다.
몇 차례만 골목을 오가며 처마와 담벼락과 출입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창살 하나, 낡은 나무 대문 하나에서도 빛 바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서울의 다른 골목 지역과 달리 붉은 벽돌로 쌓은 담벼락이 드문 편<사진>이어서 60~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자주 나온다. 붉은 벽돌집은 80년대 이후 많이 지어졌다고 한다.
오후 2~3시 무렵, 골목에서 막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지나간 뒤 담벼락에는 ‘○○♡△△’ ‘××바보’ 같은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아이들도 골목도 변하지 않았다는 깨달음.
이 일대는 작은 역사 박물관에 비유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시가 개발의 광풍(狂風)을 겪는 동안에도 이 동네는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다. 골목에서 만난 70대 할머니는 ‘26살에 시집와서 줄곧 이 골목에서만 살았다’고 했다. 이발소나 옷 수선 집, 집 앞에 내어 놓은 화분 하나까지 옛 생각을 나게 하는 곳이다. 골목을 빠져 나와 배문고 정문 맞은 편 위쪽에 있는 성우이용원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이용원은 영화세트 같지만, 엄연히 영업을 하는 가게.
서울역에서 올 경우, 만리재 길로 올라 와 공덕동로터리 방향으로 진행하다 고개 정상 부근에서 왼쪽으로 좌회전(공덕동 로터리에서 왔다면 우회전)해서 올라가면 된다. 고개 초입에 ‘배문고 방향’을 알리는 팻말이 있다. 서울역에서 롯데마트 정문 쪽으로 나와 0016번 버스를 타면 배문고 앞에서 내릴 수 있다.
골목만 옛날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아니다. 공릉동 서울산업대 캠퍼스는 시대극 전문 촬영장이다. 튀는 건물 하나 없이 키 작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숨어 있는 곳. 다산관(생산정보공학관)에서 ‘공동경비구역JSA’를 찍었다. 둥그런 모양에 시침·분침· 초침이 제각각 노는 것 같은 투박한 시계탑이 우뚝 솟아 있다. 굳이 이곳이 영화 촬영지였다는 정보가 없어도 TV나 영화 속(특히 과거 회상 장면)에서 몇 번 봤음직한 건물이어서 찾기에 어렵지가 않다. 안으로 들어서면 툭 떨어질 것 같은 샹들리에가 덩그러니 걸려 있고, 중앙 복도를 가로질러 나가면 조그만 뜰도 나온다.
한 눈에 노년기(老年期)에 접어든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낡은 대륙관(토목관)에선 드라마 ‘국희’, ‘제 5공화국’을 찍었다. 녹슨 창살, 뾰족한 지붕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변에 분홍색 꽃을 피우고 있는 벚나무만 없었다면 흑백 영화로 착각할 정도. 건물 사이사이로 난 길을 거닐어보니 70~80년대를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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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솔’ 민호네 옥탑방 한 번 놀러가 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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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에는 왜 옥탑방이 많이 나올까. ‘옥탑방 고양이’(2003년 6월)에서 시작된 옥탑방 계보 드라마가 끊이지 않고 있다.
옥탑 방은 원래 서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 이성재 KBS 섭외부장은 “서민층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선 달동네나 지하셋방, 옥탑방 이 세가지 상투적인 무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야외 촬영에서 같은 조건이라면 그래도 화면에 담을 게 많은 옥탑 방을 고르게 된다”고 말했다. 물론 여기에는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옥탑 방의 리얼리티는 없다. 드라마에 리얼리즘을 요구할 시청자도 어차피 없을 테니까.
옥탑은 아예 처음부터 판타지적 공간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비(정지훈)가 주연한 KBS ‘이 죽일 놈의 사랑’. 주인공은 어딘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확인 결과, 명동 신세계 맞은편 ‘다비치 안경’ 건물 옥상으로 밝혀졌음) 고가도로와 대형 전광판이 바라다 보이는 도심 건물의 옥상에서 사는 인물이다.
김규태 PD는 “도심 한 복판의 빌딩과 대조되는 공간으로서 옥탑 방을 설정했다”며 “이를 통해 주인공의 현실(옥탑)과 도시(고층빌딩)가 대립되는 장면을 구현했다”고 말했다. 감독이 그린 것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피한 주인공의 고립(孤立), 바깥 세상과의 불화(不和), 이런 것들이다. 최근 종영한 ‘굿바이 솔로’의 민호(천정명) 역시 도심의 옥탑 방(촬영지는 연세빌딩 뒤편 골목 안 고기 집 청목원 옥상) 거주자였다.
사실, 이런 거창한 미학적 이유를 달지 않아도 PD들이 옥탑 방을 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드라마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림이 예쁘기 때문이다. 카메라로 ‘풀 샷’을 잡았을 때 배경이 다 드러나고, 공간적으로 옥상을 가운데에 놓고 여러 각도에서 비춰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상도동 일대가 옥탑 방 드라마 단골 촬영지. 상도터널 위에 있는 ‘본동초등학교’를 지나, 언덕길을 올라 가면 ‘명진슈퍼’가 보인다.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옥탑 방이 있는 건물이 몇 채 보인다. 여의도와 중지도, 기차가 지나는 한강철교까지, 여기서 보는 한강 풍경은 꽤나 시원하다. 다음달 MBC가 ‘신돈’ 후속으로 방송하는 주말드라마 ‘불꽃놀이’는 인근 흑석동에서, 곧 시작되는 KBS의 새 일일드라마 ‘열아홉 순정’은 상도동에서 촬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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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처럼 ‘사랑의 서약’ 해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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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의 사랑 고백이나 데이트 장면을 찍기 위해 ‘서울이면서도 서울이 아닌 듯한’ 장소를 물색하는 드라마 제작진들이 꼽은 ‘예쁜 성당’ 두 곳.
후암동 성당
안 마당은 작고 아담했다. 성당은 후암동 주택가에 숨어 있다. 준상(배용준)이 유진(최지우)에게 사랑을 고백한 장소. 두 사람은 동네어귀를 산책하다 오르간 소리를 듣고 성당으로 들어갔다.
겨울연가의 순례자들은 이곳을 찾아 얼마나 많은 길을 헤매었을까.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많이 찾는 명소. 계단 초입에는 일본어로 씌어진 안내판도 있다.
특히 두 사람이 걸어 올라가던, 안 마당에서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눈 여겨 볼 것. 가로등, 비스듬한 계단의 선, 그리고 조각처럼 걸린 하늘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지하철 1·4호선 서울역 하차, 4호선 방향 벽산빌딩 출구로 나와 걸어서 15분. 승용차를 가지고 왔다면, 용산고 사거리에서 병무청 방향으로 좌회전해, 20~30m 정도 오면 오른쪽에 이정표가 나타난다.
중림동(약현) 성당
이곳에 오면 서울역 주변의 아우성, 도심의 탁한 소음이 일순 사라진다. 서울역 근처에 이렇게 독특한 건물이? 바로 중림동 성당<사진>.
1892년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축물이다. 벽돌로 지어 올린 작은 성당이 고색창연하면서도 똑 떨어지게 예쁘다. ‘약현 성당’이라고도 불리는데, ‘약현’(藥峴)이란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 이름. 옛날에 약초밭이 많아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성당 안에 꼭 들어가 보자. 조용하고 서늘하다. 몇 분 동안의 도피처, 잠시 쉬다 갈 수 있는 쉼터로 좋다. 우아한 아치를 그리는 천장과 석조 기둥, 오래된 마룻 바닥, 오색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스테인드 글라스. 단아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빠져있다 보니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면 참 좋겠다’라는 불순한 생각도 슬쩍 든다. 서울역에서 염천교 방면으로 좌회전하면 보인다. 홈페이지 http://church.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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